HAVING ME TIME
[칼럼]나쁜 비판의 잉여쾌락 본문
올드패션은 이제 그만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인위적으로 상처를 입혀야 누군가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낡은 생각일 수 있다. 성장은 자신을 알게 되는 체험인데, 그가 제 작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자기도 잘 아는’ 단점이 아니라 ‘자기는 잘 모르는’ 장점이다.'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단점을 하나씩 없애서 흠 없이 무난한 상태로 변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도 다른 또렷한 장점 하나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좋다. 현대사회는 무조건 비판한다. 자신의 쾌락과 우월함을 느끼기 위해서. 왜 이렇게 각박해져버린 걸까?
나의 중학교 친구들은 게임을 좋아한다. 이 게임은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약자는 표현할 수 없다. 언제나 더러운 표현을 들고 살아야 한는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그만 뒀다. 경쟁심이 강한 타입도 아니고 멘탈이 탱탱하고 부드러운 순두부라서.
잉여쾌락이란?
대상을 위해서지 주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비판은 대상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어야지 주체가 무언가를 가져가버리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잉여 쾌락이라고 할 만한 부산물을 산출해내고 그것을 주체가 향유하는 비판, 그렇기 때문에 대상은 빈곤해지고 주체만 풍요로워지는 비판은 나쁜 비판이다.
잉여쾌락의 몇가지 측면
첫째, 절약의 쾌락.
프로이트의 말대로라면 쾌락은 절약의 결과다. 어떤 대상(사람 혹은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섬세해져야 하는데 거기엔 에너지가 투자될 수밖에 없다.
둘째, 소속의 쾌락.
나쁜 비판은 진실의 복잡성을 훼손하는 데서 나아가 세상을 양분(兩分)한다. 하나의 범주에 ‘그들’을 쓸어 담으면 여집합으로 ‘우리’가 생겨난다. 문제는 이런 나쁜 비판들 주변에도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다.
셋째, 쌤통(샤덴프로이데)의 쾌락.
정파적인 언론들이 반대 진영 인사를 공격하는 기사를 분별없이 쏟아낼 때 ‘비판’이라는 것은 언론의 사명이 아니라 변명처럼 보인다.
글을 마치며, 글쓴이는 말한다.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꼬집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누군가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 증오가 사라지면 자신의 고통을 상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원글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00723030003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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